제목 : 한국인에게 무구정광경의 의미
이름 : 심승구
등록일 : 2007-05-24 10:24:29
한국인에게 무구정광경의 의미는?
이문규 교수 계간 '역사비평'에 기고
(서울=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 얼마 전 석가탑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학계의 격렬한 반론이야 예상된 반응이었지만 무구정광경의 연대에 대한 일반인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였다. 관련 기사의 댓글로 어려운 학술 논문에서 찾은 '무구정광경이 세계 최고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올라오기도 했다.
세계 최고의 인쇄물이라는 석가탑 무구정광경은 과연 한국인에게 어떤 의미일까?
전북대 이문규 교수는 전상운 성신여대 전 총장이 펴낸 '한국과학사'의 한 구절을 인용해 이 질문에 답한다.
'우리의 옛 인쇄기술과 인쇄문화는 한국의 전통문화를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위대한 유산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그중에서도 으뜸가는 인류 최고의 문화유산인 것이다'
그러나 이 교수는 "우리는 과학문화재와 관련해 한국인의 창조성이나 독자성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반문한다.
이 교수는 곧 발행될 계간 '역사비평(역사문제연구소 펴냄)' 여름호에 기고한 '동아시아 역사 속의 과학, 다시 읽고 쓰기'에서 무구정광경 등 과학문화재를 둘러싼 논란 속에서 과학사 서술에 얽힌 국가간 금메달 경쟁의 분위기를 들춰낸다.
이 교수는 전상운 전 총장의 말은 "인쇄술의 기원이 한국에 있을 것이라는, 적어도 인쇄술 발명의 초기단계에서 한국이 상당한 수준의 인쇄술을 보유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해석한다.
이 교수는 "그러나 중국학자들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대한 한국 학계의 견해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중국 학자들은 석가탑에서 무구정광경이 발견됐다는 사실만 인정한다. 중국 학계는 석가탑 무구정광경은 8세기 초반 중국에서 인쇄된 뒤 한국에 전해진 것으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은 1974년 시안(西安)에서 발견된 산스크리스트어 다라니경이라고 주장한다.
이 교수는 "인쇄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국과 중국 간 우선권 다툼의 배경에는 중화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국인의 태도와 더불어 전통과학에서 창조성이나 독자성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한국인의 특성이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교수는 과학사 서술에서 창조성이나 독자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자칫 한국과학사 전체를 초라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고 강조한다. 독자적이거나 창조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뛰어난 과학적 성취가 묻혀버린 사례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는 것.
무구정광경만 하더라도 인쇄기술의 수준은 매우 조잡한 단계에 불과하다. 반면 고려시절 사찰인 개성 총지사에서 발견된 보협인다라니경(1007년 간행)은 그림을 인쇄할 정도로 발달된 인쇄수준을 보인다.
'최고'나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지 못한 이유로 팔만대장경, 조선시대 갑인자(甲寅字)'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 보협인경은 대중적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교수는 한국과학사가 풀어야 할 숙제 몇 가지를 제기한다.
"최고와 최초에 지나치게 집착하기보다는 역사 속의 과학으로 이해할 것, 한국의 과학에만 주목하지 말고 동시대의 중국 및 일본 과학과의 비교연구에 적극적일 것, 특정한 시대의 특정 과학이 아니라 한국과학사 전체에 대한 통사적 이해를 가질 것"
이 교수는 이 과제가 반드시 선결돼야 한국과학사를 넘어 동아시아과학사의 시각에서 전통과학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한편 역사비평 여름호는 조선시대 양반을 세습적인 신분이 아닌 계급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가톨릭대 유승원 교수의 특별기고를 비롯해 기획쟁점 '노무현 정부의 한미관계, 어떻게 볼 것인가' 등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