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 문화 연구원 (2006 ~ 2023)
제목 : 의의와 한계
이름 : 최여미
등록일 : 2005-10-26 20:4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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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궁성문 개폐 및 수문장 교대 절차란 

조선시대의 수문장은 도성과 궁성의 각 문을 관장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조선왕조는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보다 철저히 하기 위해 예종 1년(1469)에 처음으로 수문장을 설치하고,『경국대전』에 법으로 제도화하였다. 원래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당번에 따라 수위(守衛)하도록 되어 있던 것을 별도로 수문장을 두어 그 책임을 맡긴 것이다. 조선시대 이전에도 별도의 수문장이 없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수문장제의 설치와 운영은 조선시대 도성 및 궁궐수비의 특성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수문장은 크게 도성문을 지키는 ‘도성 수문장’과 궁궐문을 지키는 ‘왕궁 수문장’으로 구분된다. 그 가운데 왕궁 수문장은 국왕의 신변을 직접 책임 맡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중시되었다. 따라서 흔히 수문장 하면 바로 왕궁 수문장을 지칭하기도 하였다. 왕궁 수문장은 궁궐을 수호하기 위해 쌓은 궁성의 문을 관리했기 때문에 ‘궁성 수문장’ 이라고도 불렀다. 
궁성 수문장은 순번에 따라 주야로 각 문을 수위하면서 궁성문의 개폐와 출입자의 관리·감독, 궁궐문의 수호 등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궁성문은 처음에는 자물쇠를 채우지 않고 닫기만 했던 것을 예종대 남이의 옥사가 있은 후 별도의 자물쇠를 만들어 궁성문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성문을 열고 닫은 후에는 열쇠는 반드시 승정원에 반납하여 보관하도록 하였다. 만일 문을 여닫는 시간외에도 왕명을 받은 선전관이 개문(開門)과 폐문(閉門) 표신을 제시하면 특별히 열고 닫았다. 또한 국왕이 궐밖에 행차 시에는 궁궐문의 열쇠를 수문장이 직접 관장하는 임무를 맡았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수문장은 서반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국왕이 임명하는 방식으로 근무를 섰다. 수문장이 모두 20명이었으나 정직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한때 군공을 포상하기 위해 430여명으로 늘어나기도 했으나, 전란후 원래대로 정비되었다. 특히 양난을 거친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와 당직 근무를 더욱 엄격히 할 필요가 생겨나면서 새로이 ‘수문장청(守門將廳)’이라는 종6품의 관아를 설치하였다. 그 인원도 1746년(영조 2)에 반포된 『속대전』에는 수문장에 종6품직 5명, 종9품직 18명 등 23명으로 정해졌다. 그 후 1863년(고종 2)에 반포된『대전회통』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다. 이 밖에 조선후기에는 함흥, 전주, 수원 등지의 왕실 묘전(廟殿)을 지키는 4곳의 ‘각전수문장(各殿守門將)’ 이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의 궁성문을 수호하는 수문장의 책무는 단순히 문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의 안위와 직결되는 막중한 역할이었다. 국왕이 임어하는 서울의 도성과 궁성문을 관장하는 수문장제는 조선시대 도성방어는 물론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자 핵심조직으로서 그 제도가 근대식 제도로 개편되는 고종 31년(1894)까지 그 역사적 기능을 다하였다. 

  2) 고증과 재현은 어떻게 하였나?


본 고증작업은 경복궁의 흥례문 복원을 계기로 추진되었다. 따라서 경복궁이 건재하던 임진왜란 이전을 대상시기로 정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궁성문의 개폐 규정은 태종·세종대에 정비된 반면에, 수문장 제도는 예종대에 설치되어 성종대에 편찬된 『경국대전』에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 다만, 성종은 경복궁에서 즉위만 하였을 뿐 실제로 임어한 국왕은 중종으로서, 30년간 경복궁에서 살았다. 따라서 본 고증작업도 『경국대전』을 중심으로 한 조선전기를 대상으로 하되, 특히 중종대에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개폐 및 수문장 교대 절차를 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조선시대 궁성문의 개폐는 도성문 보다 늦게 열고 일찍 닫았다. 도성문은 파루(오전 4시경)에 성문을 열고 인정(오후 10시경)에 닫은 반면에, 궁성문은 해가 뜰 때(平明, 보통 오전 5시경)에 열고 해가 질 때(初昏, 보통 오후 6시경)에 닫았다. 
궁성문은 수문장이 단독으로 열고 닫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승정원의 주서가 승지로부터 궁성문의 열쇠를 받은 후, 도총부 당하관인 낭청·액정서 사약과 함께 직접 성문을 열고 닫았다. 이처럼 3사람이 반드시 함께 모여야만 성문을 열고 닫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왕실의 수호를 철저히 하기 위해서였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외문이자 남문 역할을 하였다. 광화문 앞에는 의정부를 비롯하여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 등의 6조와 각종 관청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왕의 모든 명령과 정교, 관료들의 상주와 복명이 이 문을 통해 전달되었다. 따라서 광화문에는 다른 어떤 문보다도 많은 장수와 입직군사가 배치되었다. 광화문에는 수문장 1명에 수문군이 대문에 30명, 좌우 협문에 20명 도합 70명이 배치되었다. 여기에 배치된 병사들은 중앙군인 오위의 기간병인 정병과 갑사, 그리고 대졸이다. 
광화문에는 호군으로 임명하는 요령장 1명과 정병 2인으로 구성된 요령군을 초저녁에 병조에서 방울을 받고 군호를 받아 흔들며 밤새 궁성을 순찰하는 임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또한 광화문 문루의 종을 메달아 시각을 알리는 수종장과 이를 담당하는 수종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입직군사들은 3일마다 교대하되, 근무조 내에서 식사와 휴식을 번갈아 가며 하였다. 당시 근무 교대 시간은 대체로 궐문을 열기 전과 업무가 끝나는 신시(오후 4시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궁성문의 개폐 절차와 수문장 교대 절차가 반드시 함께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고증은 『경국대전』과 『왕조실록』을 근간으로 하고, 『승정원일기』·『일성록』·『속대전』·『대전통편』·『대전회통』·『만기요람』·『춘관통고』·『대한예전』·『석담일기』·『반계수록』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자료를 참고로 하였다. 특히『국조오례의』와 19세기의 자료인『왕세자두후평복진하도병』에 보이는 수문 군사들의 배치와 자세 등은 본 행사의 고증에 큰 힘이 되었다. 
본 재현행사는 위와 같은 고증을 바탕으로 광화문의 개폐 절차와 수문장및 요령장의 교대 절차 등을 하나의 의식으로 재현하였다. 하지만, 본 고증의 결과는 본래 전체의 온전한 모습에서 본다면 절반도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어찌 보면 자료의 한계로 궁성문 개폐 및 수문장 교대 절차를 완벽하게 복원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가능한 조선시대의 궁궐호위 체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제한된 자료를 재구성하였음을 분명히 밝혀둔다. 혹 오류가 있다면, 수정을 통해 보완하는 것으로 누를 덜까 한다.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선전기 궁성문 개폐 및 수문장 교대 절차가 조선의 궁중문화 내지 왕실 호위문화의 일단을 이해하는데 조그만 보탬이라도 된다면 그만한 다행이 없겠다. 다만, 복식의 부분은 단국대 박성실 교수님이 맡아 주셨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린다. 

 3) 재현의 뜻 

조선시대 궁성문 개폐 및 수문장 교대 절차의 재현은 경복궁의 중문(中門)인 흥례문 복원을 기념하고 월드컵 개최를 통해 한국의 격조높은 전통문화를 선보이기 위해 엄밀한 학술적 고증과 분석에 의거하여 준비된 최초의 재현행사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 동안 조선시대 궁중문화를 소개하는 재현행사는 몇 차례 있어 왔지만, 궁성문 개폐와 관련된 재현행사는 처음있는 일로서, 조선시대 왕궁 수비의 절차와 궁중의 일상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라고 할 수 있다. 
본 행사가 열리게 된 것은 경복궁의 중문(中門)인 흥례문(원래의 명칭은 弘禮門)이 85년만에 복원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원래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은 3개의 대문이 있었다. 경복궁의 내문(內門)인 근정문, 중문인 흥례문, 외문(外門)인 광화문이 그것이다. 조선의 백성이 왕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 3개의 문을 통과해야만 했고, 조선의 왕이 백성을 만나기 위해서도 역시 이 3개의 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따라서 경복궁의 근정문, 흥례문, 광화문은 조선의 왕과 백성을 하나로 이어주는 통로이자 조선왕조의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그러던 것이 1915년 일제가 조선총독부의 청사를 짓기 위해 경복궁의 근정문만 남긴 채, 흥례문을 완전히 철거하고 광화문은 건춘문 옆 한쪽 구석으로 옮겨놓았다. 조선의 맥을 끊는 잔인한 만행이었다. 해방후 광화문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으나, 흥례문이 있던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동안 흥례문은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다시 흥례문이 복원됨으로써, 조선 궁궐의 상징이자 정궁인 경복궁은 아직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

조선시대 수문장은 엄격한 절차에 따라 궁성문을 여닫고 근무를 교대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은 물론 국가의 안위를 수호해 나갔다. 그러므로 궁성문 개폐 및 수문장 교대 절차는 조선시대 왕실 호위 문화의 정수라는 의미를 갖는다. 조선왕조가 경복궁을 세워 큰 뜻을 펼치고 대원군이 경복궁 중창을 통해 국가재건의 전기로 삼았듯이, 이제 흥례문 복원과 월드컵을 계기로 이루어진 궁성문 개폐 및 수문장 교대 절차를 통하여 조선의 전통문화를 되살리는 동시에 21세기를 여는 국운 중흥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심승구 (행사고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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