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 문화 연구원 (2006 ~ 2023)
제목 : 문화외교와 의전
이름 : 심승구
등록일 : 2007-05-27 22:4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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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외교와 의전 
 
 
나는 본래 행정에 대해 문외한 일 수밖에 없다. 행정 경험이라고는 군대 복무를 연대 인사과에서 근무한 것, 그리고 영남대학교 박물관장과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한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문화재청의 일을 맡은 지 어언 33개월이 되고 보니 이른바 행정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조직과 예산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략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차장과 국장, 과장들이 모두 20년 이상의 경력을 갖고 있는 행정의 달인들이어서 행정 자체에 큰 어려움은 느끼지 않고 있다. 때로는 청장으로서 고민해야만 하는 어려운 일도 있는데 이럴 때는 정부대전청사 같은 건물에 근무하는 8명의 다른 청장님들께 조언을 구하면 좋은 해답을 얻게 된다. 

그러나 청장으로서 아직도 제대로 일해 내지 못하는 정말로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문화유산을 통한 외교, 그에 따르는 의전, 그리고 대외원조라는 국제협력의 문제들이다. 이것은 내가 청장이 되기 전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문화유산 통한 외교 쉽지 않은 일

부끄러운 얘기지만 청장이 되기 전에는 외교란 외교통상부만의 고유 영역인줄만 알았다. 그러나 외교는 정부 48개 부처 모두가 자기 분야에서 능력껏 수행해야 하는 중대한 과제인 것이다. 이를 위해 문화재청 조직에도 문화재교류과가 있었다. 그러나 과장 밑에 몇 명의 직원만으로는 본격적인 문화 외교 업무를 수행하기 힘들다고 판단되어 나는 이 부서를 국제교류과라고 이름을 고치고 여기에 힘을 실어 주었다. 

현재 문화재청의 국제교류과에서 주력하고 있는 분야는 우리 문화유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보다 많이 등재될 수 있게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에서 문화유산은 석굴암과 불국사 등 7건, 기록유산은 훈민정음 등 4건, 무형유산은 종묘제례 등 3건이며, 자연유산은 아직껏 등재된 것이 없다. 이에 문화재청은 2년간의 준비 끝에 올해에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을 신청하여 세계자연유산위원회(ICUN)의 심사를 거쳐 오는 6월 23일부터 뉴질랜드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의결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청장이 되기 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문화재청의 고유 업무인 줄도 몰랐고, 유적이 뛰어나면 심사를 신청해서 등재되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세계유산에 등재되기 위해서는 당해 유산의 고유가치가 뛰어나야 함은 필요조건일 뿐이고, 충분조건을 채우기 위해서는 보존 실태, 보존 의지 그리고 그 유산에 대한 학술적 연구 축적이 뒤따라야 한다. 그 심사 기준은 날로 까다로워지고 있는 추세다. 그래서 이번에 제주도를 세계자연유산에 등재하기 위하여 지난 2년간 제주도청에서는 많은 유적지 주변을 재정비하였고 문화재청은 두 차례의 국제 학술대회를 열어 이 충분조건을 더욱 충실히 충족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유산 가치 뛰어나도 외교력 뒷받침돼야 세계유산 등재

그렇게 하고도 또 남는 문제는 외교력이다. 여기서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외교통상부 등과 긴밀하게 업무를 협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네스코에 관계하고 있는 학자들, 이혜은(동국대), 임돈희(동국대), 이상해(성균관대), 우경식(강원대), 조도순(가톨릭대) 교수 같은 전문가들과 문화재위원회천연기념물 분과위원장 이인규(서울대) 교수 등의 힘을 크게 빌리고 있다. 이 분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보고 있으면 우리나라의 최대 경쟁력은 역시 인적자원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리고 다자간에 이루어지는 외교력이란 평소의 긴밀한 양자관계가 바탕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꼭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만을 위해서는 아니지만- 평소에 여러 나라, 특히 이웃 나라들과 긴밀하게 협력하는 문화유산 외교를 펼치고 있다. 

근래에 들어 와서는 점점 많은 나라들이 대한민국을 ‘단기간에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위대한 민족, 부러운 나라’라고 존경을 표하며 우리나라와 교류하고 협력하기를 원하고 있다는데 문화재청도 예외가 아니다. 

예를 들어 2007년도에 문화재청에서 외국과 문화유산 분야의 교류 내지 협력 사업을 벌인 것을 보면 중국 국가문물부, 일본 문화청, 베트남 문화유산국, 몽골 교육문화과학부, 프랑스 고문서보존 센터 및 러시아, 멕시코, 스페인, 페루, 우즈베키스탄, 카자흐, 터키, 라오스 등이다. 협력사업의 내용은 인적 교류, 협력 약정, 공동 과제의 연구 발표, 공동 학술조사, 공동 발굴조사, 천연기념물의 공동관리와 정보교환, 유네스코에서의 공동협력 등 다양하다. 특히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고궁박물관, 국립해양유물전시관 등 부속기관들의 학술교류는 날로 증대하고 있다. 

이런 외교적 협력은 그 자체만으로 큰 의미를 지니지만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때는 큰 힘이 된다. 또 문화재청은 지금 유네스코 아시아무형유산센터를 전주에 유치하기 위하여 일본, 중국과 경쟁하고 있는데 평소에 다져왔던 문화외교의 역량이 결정적인 힘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국제적 위상에 걸맞는 ‘문화적 원조’ 중요

다음에는 다소 생소하지만 외교의 또 다른 형태인 원조의 문제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원조라면 다른 나라로부터 원조를 받는 것만 생각했지 우리가 나서서 다른 나라에 원조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청장이 되고서야 비로소 절감했다. 

우리나라가 무역량이 세계 11 위에 올라 있는 경제 강국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히 원조를 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우리의 경제성장은 문화적으로 한류가 형성되어 우리의 문화가 동남아를 비롯한 세계로 뻗어나가는 배경이기도 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국제 사회에서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렇게 예전과는 여러 가지로 달라져 있다. 이것을 우리는 그저 자랑으로만 삼을 일이 절대로 아니다.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이 커진 만큼 거기에 해당하는 외교 방식의 대전환과 외교 영역의 확대도 뒤따라야 한다. 이것은 원하든 원치 않든 국제사회가 대한민국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을 게을리 하면 이코노미 애니멀이라는 국제 사회의 빈축이 우리에게 되돌아올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가 중국에 수출하는 것이 연간 약 800억 달러에 달한다. 속된 말로 그만큼 중국에 물건을 팔아 이익을 챙겼으면 어떤 형태로든지 그 나라에 문화적으로 돌려주어야 한다. 

근래에 들어와 우리나라 예산 편성에서 원조 예산이 크게 늘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원조 역시 외교통상부만이 하는 일이 아닐 것이며, 또 원조라는 것이 꼭 경제적인 원조만 있는 것도 아니다. 미국의 풀브라이트 장학금이 우리나라 학자들에게도 돌아오는 것, 재팬 파운데이션의 문화인 초청 프로그램 같은 것도 사실은 문화 교류라는 이름의 원조 형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문화재청에서는 ‘문화재 보존과학 국제연수’ 프로그램을 만들어 한류가 흘러가고 있는 나라의 문화재 전문가들을 초청하고 있다. 올해에도 아시아 9개국의 보존과학 전문가들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초청하여 3개월간 연수시키는 사업이 진행 중이다. 

문화유산의 연구와 보존 문제와 관련하여 러시아 연해주의 발해 유적을 우리 연구소팀이 발굴해 주는 것, 몽골의 청동기시대 암각화를 조사하고 탁본해 주는 사업, 베트남의 후에시에 있는 탕롱 왕릉 발굴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우리 문화유산과의 연관성도 있지만 그 자체로는 문화유산을 통한 일종의 문화적 원조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또 유네스코에서 세계 무형유산을 등재할 때 보존 위기에 있는 2개의 종목을 지정하여 ‘아리랑상’이라는 이름으로 각각 3만 달러씩 지원해 오기도 했다. 이런 문화외교는 외교통상부의 역할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문화재청의 고유 임무인 것이다. 사실 나는 문화재청에서 벌이고 있는 이러한 대외협력사업들을 국민들에게 많이 알려주면 민족적 자부심도 생기고, 마음으로 기뻐하리라고 믿으며 더욱 적극 추진해 나갈 방침이다. 


문화외교에 있어 의전의 중요성

문화유산을 통한 그러한 외교 활동은 계속 개발해 나가면 먼 훗날에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 중에 외교와 관련되어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고, 아직도 뚜렷한 대책이 마련되지 못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외교상의 의전이다. 의전은 정말로 어렵다. 의전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시쳇말로 돈 쓰고도 욕먹기 딱 십상이다. 

작년부터 문화재청은 해마다 5월 첫째 일요일에 열리는 종묘제례에 외국의 문화재청과 유네스코 관계자들을 초청하였다. 종묘는 건축 그 자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제의가 유네스코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되어 있다. 세계에는 이집트 룩소르신전, 아테네 파르테논신전 등 많은 신전들이 남아 있지만, 그 신전에서 이루어지는 제의까지 전해지는 예는 아주 귀하다. 

그래서 종묘와 종묘제의는 모두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영광을 얻었는데 정작 유네스코 관계자나 외국의 문화유산 관계자는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런 훌륭한 문화유산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것보다 큰 문화외교 활동도 없다. 허기사 내국인들도 날짜 맞추어 참관하기 힘들다. 

그래서 작년에 처음으로 70명의 외국 문화재 전문가를 초청하였는데 그 반응이 너무 좋아 올해도 계속 초대하고 싶었다. 그러나 의전에 자신이 없어서 올 해는 20명으로 초대 인원을 줄였다. 현재의 문화재청 인력으로는 20명도 사실 벅찬 숫자이다. 

작년에 나는 중국 국가문물부 초청으로 북경, 서안, 남경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중국 정부에서 나를 접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내가 청장으로서 대외협력을 위하여 공식적으로 방문한 나라는 일본, 중국, 베트남 3국이었는데 유독 중국의 의전이 격식 있고, 품위 있고, 짜임새가 있었다. 

북경 공항에 내려서 3개 도시를 순방하고 남경 공항에서 돌아올 때까지의 나의 일정이 분 단위로 짜여 있고, 배석자 명단, 방문 기관, 연구소, 박물관에서 안내하는 인원 배치 같은 것은 우리도 시행하고 있는 바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때 그 때 외국 손님을 대하는 자세와 선물을 전달하는 방식과 내용, 화제를 이끌어내는 외교적 화술 등은 다른 나라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하면서 자기들 할 얘기는 다하는 외교술과 의전은 가히 배울 만한 것이었다. 


품격있고 짜임새 있던 중국 의전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이런 것이 역사적 전통의 저력이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중국은 동아시아 문화권의 중심부 국가로서 지난 2000년간 주변의 55개 소수민족들을 어떤 식으로든 외교적으로 다스렸던 그네들만의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오늘날 중국의 국제적 위상과는 관계없이 외교에 있어서는, 아니면 의전에 있어서는 최고의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다. 비유해서 말하건대, 옛날부터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을 대대로 해온 양반집과 소금장수 해서 갑자기 부자가 된 집의 손님맞이에 차이가 있었다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중국에 갔을 때 나를 당황하게 한 것은 그곳 국가문물부 관계 기관만이 아니라 방문하는 도시의 시장 또는 부시장이 오찬이나 만찬에 초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식사 자리에서의 환담을 정말로 외교적으로 우리가 듣기 좋은 얘기를 준비해 화제를 이어가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서안 시장이 내게 선물할 품목이 비림(碑林)에 있는 오도자 그림 탁본이라는 사실을 북경의 연구소장이 미리 알고 있었다. 

옛날에 조선시대 연행(燕行)사신들이나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 추사 김정희 같은 분들이 북경에 갔을 때 그네들 삶의 규모와 방식을 보면서 산골 소년이 대처(大處)를 처음 보고 놀랐던 것과 비슷한 심정을 가졌다고 했던 것과 같다고나 할까. 그러나 담헌, 연암, 추사 선생들이 정작 그들과 맞상대할 때는 오직 지식 하나로 당당하게 한 치 꿀림없이 상대하고 돌아왔던 그 기백도 생각났다. 

나는 선배들의 그런 자세로 그들과 중국의 역사, 문화, 예술, 박물관, 발굴 얘기를 하며 중국에 대한 나의 호감을 은근히 피력하고 한편으로는 우리 문화를 적당히 내세우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끌어 갔다. 

이튿날 북경 부시장이 초청한 만찬이 있었다. 기분 좋게 식사 대접을 하고 난 뒤 부시장은 나에게 “유청장 선생. 북경을 위해 좋은 글 하나 써 주시오”라며 방명록을 내놓았다. 나는 즉흥적으로 북경에 대해 외교적으로 최대의 찬사를 적었다. 

“북경이 중국이다(北京是中國).” 
북경부시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은 크게 기뻐하며 힘찬 박수를 치고서 만찬을 마쳤다. 그리고 다음날 서안으로 갔는데 나를 안내하는 중국문화재연구소 부소장이 서안 시장이 마련한 오찬장에서 덕담을 한다고 내가 북경에서 “북경이 중국이다”라는 명구를 남겼다고 추켜세웠다. 그러자 서안 시장은 그렇다면 서안을 위해서도 한 마디 써달라며 방명록을 내놓았다. 나는 잠시 생각 후 이렇게 적었다. 

“서안이 있어서 중국이 있다(有西安, 才有中國)” 
그리고 남경으로 갔는데 이번에도 남경 시장이 만찬을 마련하였고, 나를 줄곧 안내해 온 연구소 부소장이 칭찬을 하려고 했는지, 골리려고 했는지 북경과 서안에서 내가 방명록에 쓴 글을 얘기했다. 남경 시장 역시 남경을 위해 한 마디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곤혹스러웠다. 북경은 오늘날 중국의 상징적 도시이고, 서안은 진시황릉을 비롯하여 상징적인 역사도시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었지만 남경은 과거, 현재, 미래를 다 훑어보아도 한 마디로 말할 그 무엇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게 진하게 남아 있는 남경의 인상은 끔찍했던 남경대학살뿐이었다. 그러나 남경은 역사상 한족들이 이민족에게 밀려 내려오면 수도로 삼았던 곳으로 비록 오래 가지는 않았어도 역사상 모두 여섯 왕조의 서울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적었다. 

“남경이 일어날 때, 중국이 일어났다(南京興起來. 中國就興起來了) 
이렇게 3개 도시 순방을 마치고 남경 공항 귀빈실에서 나를 성심껏 안내했던 연구소 부소장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데 그는 내가 방명록에 적은 3도시의 찬사가 인상적이었다는 얘기와 함께 “그러면 상해는 뭐라고 할 수 있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나는 웃으며 “그건 상해에 가 봐야 알죠”라고 넘겨 버리고 비행기에 올랐다. 

중국 방문 이후 나는 문화 외교와 의전의 중요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에 대한 행정 경험도 역사적 경험도 아주 빈약하지만 문화 외교의 확대, 격식 있는 의전, 그리고 멀리 내다보는 원조, 이런 사항들을 소홀히 하고서는 절대로 우리나라가 경제 강국에서 문화적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힘들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주 시급한 과제는 품위 있는 의전의 개발이라고 절감하고 있다. 
▶글 :  유홍준 문화재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