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 문화 연구원 (2006 ~ 2023)
제목 : 吳나라 귀족 무덤, 백제 무령왕릉과 똑같네
이름 : 관리자
등록일 : 2009-03-07 22: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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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나라 귀족 무덤, 백제 무령왕릉과 똑같네 

백제의 세계화는 이미 삼국지(三國志) 시대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지난달 21일 중국 장쑤성(江蘇省) 난징시(南京市) 동남쪽 외곽의 칭룽산(靑龍山) 기슭에서 손오묘(孫吳墓)의 발굴 현장을 찾은 한국 탐방단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새로 닦은 왕복 4차선 고속도로를 막아 놓은 황토 둔덕에서 150m쯤 흙길을 올라간 곳에 슬레이트 가건물이 있었다. 밖에서 보면 농촌의 평범한 공장 건물 같은 이곳 입구로 들어선 순간, 전혀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사진설명 : 중국 난징(南京)에서 발굴된 삼국시대 오나라 무덤인‘손오묘’가 지난달 21일 최초로 한국 언론에 공개됐다〈사진 위〉. 백제의 무령왕릉<아래>과 같은 양식의 전축분으로, 백제의 국제적 문화교류가 3세기부터 시작됐음을 보여주는 무덤이다. / 이오봉 월간조선 객원기자oblee@chosun.com] 

스페인 코르도바의 아랍 건물처럼 아치형 문을 지닌 고대의 건축물이 땅 밑에서 그  
자취를 드러냈다. 위에서 보면 거대한 달걀 모양의 벽돌 지붕 두 개가 천장이 뚫린 채 땅 위로 솟아나 있었고 남쪽 입구인 묘문(墓門)을 통해 이어진 묘도(墓道) 바닥은 진흙으로 축축했다. 

2005년 12월 22일 발견된 삼국시대 오(吳)나라 말기 전축분(塼築墳)이 처음 한국 언론에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함께 간 일행은 고고학 계간지 '한국의 고고학'(발행인 최병식)이 결성한 '육조(六朝)문화 탐방단'이었다. 육조는 중국 위진 남북조 시대 남쪽의 오·동진(東晉)·송(宋)·제(齊)·양(梁)·진(陳)을 말한다. 

이 무덤의 공식 명칭은 '남경 상방 손오묘(南京上坊孫吳墓)'다. 중국에서는 춘추시대나 오대십국 시대의 오와 구별하기 위해 삼국시대의 오나라를 '손오(손씨의 오나라)'라고 한다. 난징을 처음 도읍지로 건설한 사람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삼국지연의'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손권(孫權)이다. 

그런데 탐방단 모두가 이 무덤을 보자마자 느낀 것은 강한 기시감(旣視感)이었다. "무령왕릉과 똑같잖아!" 

1949년 이래 중국에서 수천 기가 발굴됐다는 육조 시대의 전축분이 충남 공주의 백제왕릉인 무령왕릉(6세기 초) 양식의 원조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무덤은 그 규모면에서 사람을 압도하는 데가 있었다. 무덤의 총 길이가 20.16m, 폭은 10.17m, 높이는 5m였다. 

이것을 무령왕릉의 길이 4.2m, 폭 2.72m, 높이 3.14m와 비교해 보면 길이로만 따져도 5배라는 계산이 나온다. 한마디로 '무령왕릉의 확장판(extended edition)'인 셈이었다. 

지금까지 발굴된 육조의 전축분 중에서 최대 규모라는 이 무덤은 독특한 형식을 지니고 있었다. 관이 안치된 현실(玄室)의 앞쪽으로 또 하나의 현실처럼 만든 전실(前室)을 약간 작은 규모로 마련했고, 현실과 후실의 양쪽으로 모두 네 개의 방형 방을 또 만들어 놓았다. 이건 도대체 뭘까? 동행한 난징시 박물관의 마타오(馬濤) 연구원은 "이 방들의 명칭은 '이실(耳室)'로, 부장품을 넣어 두는 기능을 했다"고 설명했다. 

규모가 큰 대신 무령왕릉에 비하면 투박한 느낌도 들었다. 연꽃과 인동(忍冬) 무늬를 새긴 무령왕릉의 벽돌과는 달리 이 무덤의 벽돌에는 문양이 없었다. 무령왕릉에서는 등잔을 놓기 위해 복숭아 모양으로 움푹 패인 보주형 등감(寶珠形燈龕)을 만들었는데 이 무덤에서는 현실과 전실 구석마다 박힌 흰색의 '소 머리' 조각 8개가 그것을 대신하고 있었다. 마 연구원은 그것의 명칭이 '수수형 석등대(獸首形石燈臺)'라고 설명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현지 학자들은 손권의 손자로 '삼국지연의'의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오의 4대 황제 손호(孫晧·재위 264~280) 시대의 종실 귀족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개 귀족의 무덤 규모가 200여년 뒤 백제 왕의 무덤보다 훨씬 컸던 셈이다. 

탐방단을 이끈 최몽룡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지금까지 무령왕릉 등 백제 문화는 육조의 동진(317~420)이나 양(502~557)나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돼 왔는데 이 무덤의 발견으로 인해 그 시기가 서기 3세기 오나라로까지 올라가게 됐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출토된 전문도기(錢文陶器·동전 무늬 도기)는 서울 풍납토성에서, 양형청자(羊形靑磁·양 모양 청자)는 강원도 원주 법천리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종류라는 얘기다. 

결국 이 무덤은 '환(環) 황해 네트워크'로 표현될 수 있는 백제의 국제적 문화교류가 삼국지 시대로까지 1세기 정도 올라가게 하는 역할을 한 셈이다. 백제는 당시 최고급 문화였던 육조(남조)의 문화를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때 서해는 생각보다 무척 좁았던 것이다. 

난징=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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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서 찾은 풍납토성과 무령왕릉 

(난징=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육조(六朝) 고도 난징(南京) 중심부를 떠나 서남쪽 외곽 드넓은 평야지대 한복판을 시원스럽게 달리던 왕복 4차선 신설 고속도로가 갑자기 얕은 황토 둔덕 앞에서 막힌다. 그 둔덕 위로는 슬레이트 가건물이 버티고 섰다. 

둔덕 너머 왼쪽과 오른쪽으로 그리 높지 않은 두 산이 놓여 있다. 

지난 달 말 고고학 전문 계간지 '한국의 고고학'의 육조문화 탐방단을 이곳으로 안내한 난징시박물관 마타오(馬濤) 연구원은 왼쪽이 황룡산(黃龍山), 오른쪽이 청룡산(靑龍山)이라고 설명한 뒤 가건물을 가리키면서 육조 중 손권(孫權)이 건국한 동오(東吳)시대 전축분(塼築墳.벽돌무덤) 발굴 현장이라고 했다. 
아스팔트 도로가 끝난 지점에서 150m 가량을 걸어 발굴현장에 도착하니 마 연구원은 안전헬멧을 쓰라고 했다. 

가건물 내부는 바깥에서 보았을 때는 그리 넓지 않을 듯했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서니 500-600평은 됨 직했다. 그 중앙에는 거대한 전축분이 길게 땅 속에 누워 있었다. 남북 방향으로 일렬로 섰던 아치형 건물 2채가 막 지하로 꺼진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 아치형 지붕 2곳은 모두 뻥 뚫려 있었다. 고속도로 건설 중에 파괴된 흔적이라고 했다. 
육조시대 전형적인 전축분 양식, 즉 무덤방은 방형, 혹은 장방형으로 만들고 지붕은 궁륭형(아치형)으로 쌓아 올린 점에서 이 고분 또한 예외는 아니지만, 여러 가지 다른 면모가 엿보였다. 
무덤 주인공을 안치하는 공간인 현실(玄室)을 북쪽에 둔 점은 여느 전축분과 마찬가지지만, 이와 거의 똑같은 규모인 전실(前室)을 그 전면에 별도로 만든 점이 특이했다. 나아가 현실인 후실(後室)과 전실을 합친 규모가 길이 20.16m에 폭 10.71m에 달했다. 
같은 육조시대 전축분인 공주 무령왕릉 현실이 길이 4m 남짓인 것과 비교하면 무려 5배에 이르는 규모다. 뿐만 아니라 이 전축분은 전실과 후실 양쪽 벽 중앙에다가 각각 이실(耳室)이라고 하는 움푹 들어간 아치형 공간을 별도로 마련했다. 이를 감실(龕室)이라 하며, 각종 부장품을 넣는 기능을 했다고 마 연구원은 설명했다. 
이런 규모는 현재까지 발굴된 육조시대 전축분 중에서는 최대다. 

남쪽 중앙에 마련한 묘문(墓門)을 통해 전실로 가기 위해서는 묘도(墓道)라는 아치형 굴을 지나야 했다. 묘도는 요컨대 무덤의 복도나 마루인 셈이다. 묘문 앞쪽으로는 묘실(墓室)에 스며드는 물을 빼내기 위한 배수구도 확인됐다. 

전실과 후실 네 귀퉁이마다 강렬한 인상을 주는 '소머리'가 벽면에 박혀 있었다. 그러니 이 고분에서 이런 '소머리 장식'이 모두 8개가 된다. 
검은 빛이 완연한 청색 계열인 벽돌 벽면에 비해 이들 소머리 장식은 황색이 특히 두드러졌다. 무엇 때문에 각 벽면 모서리마다 이런 장식을 했을까? 
마 연구원은 "등불을 놓던 시설물"이라고 설명했다. 말하자면 등잔대인 셈인데, 그런 기능은 일부 '소머리 장식' 상면에서 그을음이 발견됨으로써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등잔대 시설은 무령왕릉뿐만 아니라, 같은 중국식 전축분인 송산리 6호분에서도 발견됐지만, 이 백제 고분들에서 등잔을 놓던 곳은 각 벽면을 파서 만든 감실 구조라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미 발굴은 완료를 한 상태인 까닭에 현장에는 이렇다 할 만한 유물은 남아있지 않지만, 후실에는 여전히 튼튼함을 자랑하는 각종 목관 부재와 그것을 올려놓기 위해 바닥에 깐 석조물이 그대로 있었다. 

마 연구원에 따르면 목관은 모두 3기가 발견됐다. 중앙에 놓인 관이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그 양쪽에서 작은 관이 각각 하나씩 놓여 있었다. 중앙에 안치된 사람은 신분이 아주 높은 남자일 것이며, 그 양쪽에 묻힌 사람은 그의 부인들이었을 것이다. 

이들 관을 얹어 놓았던 석조물은 사각형으로 다듬은 긴 돌을 이용했다. 한데 그 양쪽 끝에는 용이나 호랑이로 생각되는 짐승 머리를 조각했다. 

마 연구원은 이런 관대(棺臺) 시설과 소머리형 등잔대는 모두 중국에서는 처음 확인된 사례라고 설명했다. 

이곳에서는 어떤 유물이 출토됐을까? 
마 연구원에 의하면 유감스럽게도 이미 두 차례 큰 도굴을 만나 무덤 규모나 격식에 비해 출토유물은 그다지 많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각종 도자류와 도기(陶器), 도용(陶俑), 금속제품 등의 각종 유물을 수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유물들 중에서 이번 탐방단의 관심을 특히 끈 것은 이른바 전문도기(錢文陶器)라고 해서 동전 무늬를 잔뜩 넣은 도기류와 허리띠 장식품 중 하나인 은제(銀製) 장식이었다. 전문도기는 서울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필두로 백제 유적에서 활발히 출토되기 시작했으며, 은제 허리띠 장식 또한 풍납ㆍ몽촌 두 토성에서도 중국 남조에서 수입했음이 분명한 유물이 확인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곳 '난징 상방(上坊)유적 손오묘(孫吳墓)' 출토 청자류 중 일부 역시 특히 풍납토성에서는 꽤 많은 숫자가 보고되기 시작했다. 

이번 탐방단을 이끈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최몽룡 교수는 "풍납토성이 보여주는 백제의 문화는 간단히 말하면 국제화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그 국제화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육조 문화라고 할 수 있다"면서 "그런 생생한 증거들을 우리는 이 손오묘에서 마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 교수는 "이 손오묘를 비롯한 중국 남조의 전축분 문화가 백제에서는 마침내 무령왕릉 축조로 출현하게 된다"면서 "우리가 보는 것은 중국 남조문화이면서 동시에 백제 문화라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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