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타자론적인 몸철학의 길 -메를로 퐁티
이름 : 최형국
등록일 : 2004-02-16 14:35:50
타자론적인 몸철학의 길 : 메를로-퐁티
"나는 전적으로 몸이며,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정리 : 최형국
1. 몸철학을 위한 존재론의 바탕
"인간에서 정신보다 몸이 더 근원적이다.
정신은 몸이 자신을 위해 임시로 만들어내는 장치일 뿐이다."
지금까지 인간들이 정신의 세계를 대단히 여기게 되는 것은 데카르트의 사유 실험에서처럼 자기 정신이 자신 스스로를 반성하는 힘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온갖 상상을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자기 속에서 데카르트의 인식론적인 반성은 특수한 상상의 한 종류일 뿐이다. 인간의 상상은 현실 "나"의 의식세계에 존재하였지만 첨단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또 다른 현실 즉 가상현실의 지각세계로까지 확대 발전하였다. 이는 곧 정신의 세계와 지각의 세계 즉 몸의 세계간의 모종의 연관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철학에서 흔히 말하기를 "순수정신"이라는 절대적 가치 혹은 존재가 등장한다.(플라톤이 말했던 초월적 자아로부터) 인간은 순수정신을 통한 혹은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반성하고 반성한다고 데카르트적 사유방식인 제1철학에서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몸은 정신의 도구로서 기계론적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순수정신을 이야기하듯이 "순수몸"을 바라보자. 왜냐하면 앞서 가상현실 속의 상상된 나를 느끼는 지각세계로의 확대는 순수정신에서 순수몸까지의 일정한 연관 고리가 있기 때문이다.
순수정신과 순수몸 관계에 있어서 둘 중 누가 더 원초적인 존재인가라는 물음은 "반성"이라는 것의 시작과 끝을 보면 확인 할 수 있다. 즉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을 나누고 정신은 길이도 없을뿐더러 그렇기 때문에 나눌 수 없다고 했다. 즉 자신의 상상 속에서 자신의 몸을 두 동강 낼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쉽게 말해 정신은 물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한 물리적인 실력행사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은 종종 우리에게 가능하다고 느껴진다. 이것은 실제의 지각 다시 말하자면 물리적인 길이나 두 동강 나는 사태를 지각하는 데 근원을 둘 수 밖에 없다. 지각에 근원을 둔다는 것은 몸에 근원을 둔다는 것이다. 인간 지각의 속성은 곧 물질연관적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철학은 반성에서부터 출발한다고들 말하면서 그리고 철학이 정신 고유의 작업 영역이라고 말하면서 반성을 순수정신의 독점물인 양 여기는 것이 서양철학의 전통이다. 그런데 순수정신은 왜 반성하는가? 그리고 순수정신은 무엇으로 반성하는가? 이에 대한 물음의 답이 순수몸에 대한 이해를 좀 더 확실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반성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문제가 발생할 때 이루어진다. 그런데 순수정신적 자아는 점인 존재다. 쉽게 말해 반성의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할 경우 순수정신은 아무 내용도 없이 그저 반성한다는 형식만을 지닌 점(點)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點)에서 구체적인 내용이 아무것도 없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자기가 아닌 것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존재하는 점으로서의 순수정신이 있다손 치더라도 구체적인 내용이 전혀 없기 때문에 문제, 즉 반성할 거리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론적으로 살펴봤을 때 그 근원은 몸이라는 것이다. 즉 몸은 자신의 생존이나 자신의 운동 또는 확장에 문제가 생겨날 때 정신이라는 몸의 파생물을 만들어 반성을 시작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인간은 쉬지 않고 반성할 수 없다. 인간이 육체적 행위에 몰입해 있을시에는 어떠한 반성도 이뤄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육체적 몰입행위가 끝났을때에 비로소 반성이 시작된다. 만약 순수정신이 반성을 한다면 이러한 단속적인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내가 반성을 할 경우에는 반성의 거리를 제공하면서 몸은 존재한다. 그리고 반성하지 않을 때에도 몸은 연속적으로 운동을 하면서 연속적으로 존재한다. 이렇게 보더라도 순수몸이 순수정신보다 더 근원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몸이야말로 진정으로 근원적인 존재이다. 또한 이러한 이유로 순수정신은 결국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근원적인 존재가 아니기에 그 자체로 순수하게 또는 자기가 아닌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일 수 없기 때문이다. 몸이 필요에 따라 스스로를 변형시켜 정신이라는 형태로 자신을 발동시키기도 하고 자신 속에 거두어들이기도 하는 것이다.
메를로-퐁티가 여는 타자론적인 몸철학의 길
"진정한 몸철학은 정신철학처럼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서 출발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적 이원론에 따르면, 몸은 순전히 물질적인 것으로서 기계적인것에 불과하다. 이는 몸이 실제로 어떠한가를 보지않고 이원론적인 논리 구도로 지어낸 것에 불과하다.
현상학을 창시한 '후설'은 인간의 몸에서 물리물질적 층위, 정신감각적 층위, 의지적 층위의 세가지로 구분한다. 그리고 이 세 층위는 실제로는 항상 통일된 것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후설은 데카르트적인 기계론적 몸이론을 체계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후설 또한 여전히 순수의식 또는 절대정신을 가장 참다운 존재인 것으로 여긴다. 세 번째 층위인 의지적 층위의 형성은 이러한 존재론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후 본격적으로 몸 자체, 즉 순수몸을 논의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한 철학자는 메를로-퐁티다. 메를로-퐁티는 만지는 몸과 만져지는 몸이 있다는 이중 감각을 아주 중요한 출발점으로 삼는다. 즉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고, 능동성과 수동성을 구분하고,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각종 이원론을 극복하는 실마리를 이중감각의 현상에서 발견한다. 이러한 이중성을 띠는 몸이야말로 이 두 속성을 동시에 지니면서 이 두 속성의 질서들이 열려가는 원천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그의 몸철학의 토대가 되는 몸 자신을 여전히 나의 지각에 나타나는 나의 몸을 중심으로 발견한다. 이러한 한계는 서양철학을 지배해온 자아론적인 굴레, 즉 자아 중심의 철학적 태도의 한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자아와 의식을 토대로 삼는 '후설' 철학의 계통을 이어가며 정신 대신에 몸으로 대체하긴 했지만 여전히 '나'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넓게 본다면 데카르트의 정신 위주이자 나 위주인 철학에서 몸 위주의 철학을 메를로-퐁티는 구축해냈지만 타자 위주의 철학을 구축해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자아 중심의 철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철학의 길을 많이 열어 준 철학자이기 때문에 그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나'를 토대로 한 철학의 한계는 하이데거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구체적인 인간의 죽음을 다른 동물들이 겪는 것과 같은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만이 겪는 실존론적인 죽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생물학적 죽음은 실존론적인 죽음의 토대이다. 이러한 '나'에 대한 집착은 철저히 유아론적인 의미세계를 구축하여 '나'란 존재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의미 없는 것이라 믿게된다. 그러나 내가 죽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살아 있고, 그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의미는 얼마든지 힘을 발휘할 것이다. 만약 "나"란 존재가 죽었는데 그들이 누리는 의미가 힘을 발휘해 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는 것이 실존철학자들인데,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현실과 어긋난다는 것이다. 철학은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고, 현실에만 존재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내가 누리는 삶의 의미는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삶의 의미와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쉽게 말해 다른 존재가 있어 내가 존재하는 것이고 세상과의 관계속에서 나의 의미는 진정으로 의미 있게 된다.
타인 중심의 철학, 즉 타자론적인 철학은 앞서 제기한 '반성'이라는 것의 정체를 정확히 살펴볼 때 가능하다. 반성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즉, 반성은 반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몸과 환경 사이에서 문제가 일어나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이때의 환경은 자연적/사회적/문화적인 것이다. 몸은 환경과 일치할 때 자신을 실현한다. 일치한다는 것은 곧 몸의 운동에 지장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몸은 환경과 늘 일치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몸은 환경과 어긋나기 일쑤이다. 이러한 어긋남의 틈새를 메우기 위해 수행되는 것이 '반성'이다. 반성은 반성할 필요가 없는 상황을 지향하면서 이루어진다. 즉, 환경과의 어긋남을 일치로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반성은 환경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원천은 몸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메를로-퐁티는 이중 감각, 즉 실제로는 동일자인 만지는 몸과 만져지는 몸의 이중성에서 '일종의 반성'인 몸의 반성을 언급한다. 즉, 몸의 반성이 극대화 될 때 이른바 정신적인 반성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몸의 환경에 대한 반성은 환경의 중요한 요소인 타인에 대한 반성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타인의 몸은 나의 몸을 만지면서 주체로서 등장하고 나의 몸은 타인의 몸을을 만지면서 주체로서 등장한다. 이전의 정신위주의 철학에서는 타인의 몸이 나의 몸을 만진다고 해서 타인이 결코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메를로-퐁티가 타자론적인 철학의 길 또는 타자론적인 몸철학의 길을 여는 대목은 바로 이러한 상호신체성을 바탕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반성을 주체가 주체를 만나는 것으로 확대에서 정하게 되면 나와 타인과의 관계는 서로 반성해주는, 즉 쉽게 말해서 서로를 점검해 주는 관계가 된다. 나는 결코 다른 것의 도움 없이 나의 모든 부분을 볼 수 없다. 아무리 고개를 돌려도 나의 등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타인의 도움을 통해 나는 나의 몸을 볼 수 있고, 반성할 수 있다. 나에게 불투명한, 즉 현실화되고 그저 잠재되어 있는 내 몸의 모습이 타인의 몸을 통해, 즉 타자론적인 몸의 반성에 의해 점점 더 투명한 방향으로 열리면서 실현되는 것이다.
타자론적인 몸철학의 정치적 의미의 실마리
"몸으로 등장하는 타인의 존재는 반성을 통해 자기 속으로 초월해가는 나의 정신적 자아 영역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나의 몸인 나의 주체를 반성함으로써 함께 공동체적인 주체를 형성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서양사상의 전통을 이루어온 정신 위주의 철학은 몸에 의한 지각보다는 정신에 의한 반성을 진리의 원천으로 본다. 그럴 경우 나의 존재에 대한 주체는 확인할 수 있지만, 타인의 존재를 참다운 주체로 여길 수 있는 길은 원천봉쇄 당한다. 즉,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나버리는 유아론적 굴레를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나"는 곧 파시즘적인 자아 건립으로 인해 나 이외의 타인은 그저 기계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진정한 실체인 나는 자율적이고, 기계적인 몸으로 잘못 환원된 다른 사람들은 영원히 나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몸철학, 더 나아가 타자론적인 몸철학에서는 타인이 나와 같은 주체로 쉽게 나타난다. 타인의 행위는 내 삶의 의미를 반성하게 하는 적극적인 계기가 될 수 있다. 쉽게 말해 타인의 그런 행위는 나에 대한 애정이나 존중심과 또는 나와 함께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려는 지향을 담고 있을 수 있다. 메를로-퐁티의 상호신체성은 나와 타인과의 공동성이 근원이다. 공동체 속의 나에서 출발하여 세상을 인식하려는 것이 타자론적 몸철학일 것이다.
결국 자아론적인 정신철학과 타자론적인 몸철학 간의 투쟁은 유아론적 자아론과 공동체적 자아론의 투쟁이 된다. 내가 있기 때문에 세상이 존재하는지, 세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철학적 출발은 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