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글] 조선의 주적은 왜군이다.
이름 : 최형국
등록일 : 2003-10-31 15:24:52
-"조선의 주적은 왜군이다!"-
-24반무예보존회 최형국 사범-
<무예도보통지>는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우는 정조대에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에 의해 정조 14년(1790)에 완성된 군사무예서이다.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24가지 즉, 24반무예는 크게 지상 18반, 마상 6반으로 구분된다. 지상 18반은 도검류 10반, 창봉류 7반, 맨손무예 1반으로 세분되어 진다. <무예도보통지>는 이전의 무예서들과는 달리 매우 세밀한 그림(圖)과 자세를 풀이한 해설(譜)로 이뤄졌다. 특히 연결하여 그림을 그린 총보는 다른 무예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이다.
이처럼 조선의 황금기라 불리우는 시대를 연 군주 정조가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한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책과 '씨줄과 날줄'의 관계에 있는 <병학통>이라는 병법서를 알아야만 그 답을 풀어 갈수 있을 것이다. <병학통>은 당시 수도 서울을 주요 군영의 훈련에 필요한 진법류의 병서로1785년에 펴냈다. 전체 2권으로 이뤄졌으며, 그 첫째 권에는 장조, 별진호령, 분련, 야조, 성조, 수조 등 여섯 개의 세부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둘째 권에는 첫째 권의 훈련 진도가 그림으로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병학통>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군제사를 간략하게라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초기 조선의 주적은 여진족을 포함한 북방 오랑캐였다. 이들 오랑캐를 제압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공격법은 기사(편전)를 중심으로 한 기병무예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 당시에도 조선의 전략/전술은 기병을 위주로한 적진을 돌파하여 적의 예봉을 꺾는 것이었다.
조선군은 임진왜란 당시 전략/전술상 상당한 혼란을 겪으며 왜군들에게 무참하게 박살난다. 왜군은 장거리에는 조총을, 단거리에는 왜검으로 공략했다. 이것은 일본이 전국시대를 거치며 실전에서 검증된 효율적인 전술이었다. 또한 조선의 원군으로 출전한 조승훈 장군이 지휘했던 초기 명군 또한 북방의 기마무예가 주특기인 군사들로 구성되어 왜군들에게 철저하게 격파 당하고 만다. 기병들이 왜군의 조총을 뚫고 용캐 돌진했더라도 날카로운 왜검에 갈기갈기 찢기는 신세를 모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은 남병(절강병)은 원앙진(1500년대 중엽에 척계광 장군이 창안한 것으로 왜구를 몰살시켜 명성을 얻었던 분대 단위의 진법)을 토대로 한 창검무예에 밝은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선군은 평양성을 탈환할 때 남병들이 보여준 빼어난 전투실력을 눈으로 확인하였다. 조선은 개인의 단병무예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국왕 선조가 나서서 단병무예를 수록한 기효신서를 입수하고, 이를 번역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책에 수록된 여섯가지 기예를 정리하여 <무예제보>를 펴내 조선병사들에게 창검무예를 익히는 교재로 사용토록 하였다.
왜군들은 장장 7년 동안 조선을 유린하다가 그들의! 섬으로 돌아간다. 임란 이후 조선의 주적은 왜로 바뀌었다. 주적의 개념이 바뀜에 따라 조선의 군사체제 또한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즉 조선초기 기병을 주력으로 편제하는 응㎢?이름만 남고 훈련도감이 이를 대신하였다. 훈련도감은 포수, 사수, 살수에 대한 삼수병을 훈련시키기 위해 전쟁 중에 창설된 부대이다.
포수나 사수는 일정기간 훈련을 시키면 적절한 성과를 거둔 반면에 살수의 훈련은 쉽게 성과를 나타낼 수 없었다. 즉, 조금 풀어서 설명하면 요즘의 군대에서도 6개월 정도 매일 사격훈련을 받으면 저격수 정도의 기량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검술의 경우 6개월 정도면 이제 칼자루나 제대로 쥘 수 있을 정도의 기량밖에 나타낼 수 없다.
이러한 살수 양성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은 영조대에 이르러 장헌세자(사도세자)가 섭정할 당시 지상 18반무예를 정리하여 <무기신식(무예신보)>을 편찬하였고, 이후 정조대에 이르러 <무예도보통지>의 24반무예를 완성하게 된다.
18기에 들어서면서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하여 드디어 다량 살상용 무기인 화포가 전쟁에 주요 무기로 사용된다. 그 중 홍이포는 강력한 파괴력과 뛰어난 조준력으로 인하여 기존의 전쟁의 개념을 뒤집어 버리게 된다.
이 즈음 서양에서는 1797년부터 나폴레옹이 대포를 가지고 다니면 전 유럽을 휩쓸고 다녔다.
안전하고 조준력이 뛰어난 다양한 개인휴대용 화기가 급속하게 동양에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임진왜란에서 박살난 기병의 수요가 급속하게 증가되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화포는 그 무게가 상당하여 사격방향을 신속하게 바꿀 수 없어서 가볍게 무장한 기병이 몇 발의 포 사격을 무릅쓰고 돌진하여 적군의 예봉을 뒤흔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병학통>은 이러한 새로운 전술을 담고 있다. 즉, 단병무예를 익힌 보병과 조총, 포차, 전차 등으로 강화된 포병, 그리고 새로이 그 역할이 강화된 기병들의 종합적인 전술 훈련서인 것이다.
정조는 <병학통>을 편찬한 5년 뒤에 아버지 사도제자(이후 장조로 추존)가 펴낸 <무예신보>의 핵심내용과 전략상 그 위상이 드높아진 기병의 무예단련을 위하여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주적의 문제이다. 앞서 제기한 대로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주적은 일본이었다. 왜구들에게 다시는 이 반도를 유린당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많은 병서가 출간되었다.
그래서 <무예도보통지> 24반무예 중 가장 많이 실려있는 것이 왜검인 것이다. 조선세법이라 불리는 예도는 전체 27페이지이며, 가장 널리 알려진 본국검의 경우 고작 16페이지에 불과한 반면, 왜검은 교전을 포함하여 100페이지가 실려 있다(교전 제외시 70페이지). 즉, <무예도보통지>는 주적인 왜군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 졌으며, 특히 다시금 중요성이 부각된 기병의 무예수련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 왜검을 익히지 않고서는 절대로 <무예도보통지>를 제대로 이해 할 수 없다. !
임진왜란 후에 조선의 병법서는 모두 훈련도감에서 편찬되었다. 물론 <무예제보>, <무예제보번역속집>, <무예신보>도 훈련도감에서 펴낸 것이다. 하지만 <무예도보통지>는 정조의 친위군영이었던 장용영에서 편찬된 것이다. 이것은 곧 정조의 친위부대의 위상을 높이고자 24반무예를 정리하는 책임과 편찬작업을 장용영에 맡겼던 것이다. 수원 화성華城은 장용영 외영이 주둔하였던 역사의 공간이다. 이 화성 또한 주적인 일본을 염두에 두고 축성했으리라.
따라서 무예도보통지는 왜검을 익히지 않고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무예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