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조선의 무과는 어떤 시험이었나?
이름 : 관리자
등록일 : 2011-09-04 10:45:32
월간중앙 <<역사탐험>> 2004년 3월호
조선의 무과는 양반의 과거, 평민의 희망이었다.
심승구(한국체육대 교양학부 교수)
1. 조선의 무과란 ?
조선왕조는 양반관료제 사회였다. 조선시대에 관직으로 나가는 길에는 과거를 비롯해 문음․천거․취재 등이 있었지만, 모두 과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과거가 다른 인재등용책에 비해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방법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합격한 사실은 곧 지배신분층으로서의 능력과 자질을 인정받는 것이고 관료제사회에서 출세를 보장받는 길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과거를 향한 모든 사회구성원의 열망은 필생의 목표이자 숙원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의 과거에는 문과, 무과, 사마시, 잡과 등 4가지 시험제도가 있었다. 문과가 최고엘리트이자 문인 정치관료를 뽑는 시험이라면, 무과는 무장이자 무인 정치관료를 뽑는 시험이었다. 반면에 사마시는 생원․진사라 불리는 예비관료이자 양반의 권위를 인정받는 시험이고, 잡과는 각종 기술관, 즉 중인층을 선발하는 시험이었다. 이러한 시험제도가 완전히 갖추어진 것은 조선왕조에 들어와서였다. 특히 무과는 다른 시험과 달리 조선왕조에 들어와 처음 시행됨으로써, 조선 과거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2. 무과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무과가 역사상 처음 등장한 시기는 당나라 측천무후 때인 702년이다. 수 문제 때(587년) 문과가 시행된 지 116년 뒤의 일이다. 무과의 실시가 늦은 이유는 과거가 문치주의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시행된 탓이었다. 본래 과거제는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한 군주가 나라를 문치주의로 이끌기 위한 인재선발방법이었다. 군주들은 반독립적인 호족세력들의 무력 기반을 흡수하고 문신관료로 전환하기 위해 무과보다는 문과를 권장하였다. 그러한 경향은 고려 건국된 후에도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광종 9년(958)에 처음 과거제를 도입할 때 문과와 잡과만 시행하고 무과를 실시하지 않은 까닭은 그 때문이었다. 그 후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예종때 무과가 시행되기는 했으나 문신귀족들의 반대로 곧바로 폐지되고 말았다. 고려의 불균형한 과거제는 조선왕조에 들어와 개선될 수 있었다. 이 무렵 지방 향리의 토호적 성격이 제거되고 군현제도 정비되어 무과를 실시할 만한 정치사회적 기반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문무불가편폐(文武不可偏廢)’의 기치아래 문과와 무과를 균형있게 실시하려 하였다. 시험에 의한 능력 중심의 인재를 뽑아 관리의 질을 향상시킴으로써 양반관료제의 합리적 운영을 꾀하고자 하였다. 바로 그러한 의도 속에 태종 2년(1402)에 무과가 비로소 시행되었다. 문과와 함께 시행되기 시작한 무과는 약 1세기간 정비과정을 거쳐 성종대 『경국대전』의 반포로 일단락 되었다. 그 후 무과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시험 종류와 과목이 추가되고, 선발인원이 크게 증가하면서 변화하였다. 무과는 1894년 7월 근대식 선발제도가 출현할 때까지 493년간 고위 무관 선발제도로서 역할을 다하였다.
3. 무과의 종류와 절차
무과의 시험종류는 크게 정기 시험인 식년시와 부정기시험인 각종 별시로 구분된다. 우선, 3년마다 한번씩 시행하는 식년 무과는 28명을 선발하였다. 문과의 33명보다 적은 수로서, 불교의 ‘33천 28수’ 에서 비롯한 것이다. 식년 무과는 초시, 복시(회시), 전시의 3단계가 있었다. 1차 시험인 무과 초시는 식년(인, 신, 기, 해) 가을에 보고, 복시와 전시는 식년(자, 오, 묘, 유) 봄에 시행하였다. 초시는 서울의 훈련원시와 7도(경기도 제외)에서 보는 향시가 있었다. 훈련원시는 70명, 향시는 120명(경상 30, 충청․전라 각 25, 강원․황해․함경․평안 각 10)으로 모두 170명을 뽑았다. 2차 시험인 무과 복시는 초시 합격자를 서울로 모아 28명을 뽑았는데, 경쟁률이 약 7대 1이었다. 최종 시험인 전시는 국왕이 친림한 가운데 복시합격자 28명을 시험보아 갑과 3인, 을과 5인, 병과 20인 등 최종 석차를 정하였다. 둘째 부정기시험인 각종 별시에는 증광시, 별시, 외방별시, 알성시, 정시, 관무재, 권무과, 도시 등이 있었다. 각종 별시는 사마시나 잡과는 없고 문․무과에만 있는 시험이다. 정기시험 이외 각종 별시의 시행은 국가의 필요와 더불어 과거 진출을 바라는 사회적 요구 때문이었다. 이들 별시는 초시․전시 2단계로서 모두 서울에서 보는 것이 원칙이었다. 선발인원은 일정한 정원 없이 그때그때 정해졌다. 적게는 10명에서 많게는 한꺼번에 수백, 수천, 심지어는 2만 여명을 뽑기도 하였다. 이처럼 한꺼번에 수천 명을 뽑는 무과를 ‘만과(萬科)’ 라고 하는데, 무과만의 특별한 선발 현상이었다. 4. 응시자격 - 문과와 같은 무과의 응시자격 그 동안 무과의 응시자격은 ‘양반자제에게만 국한된 문과와는 달리 별로 제한이 없어 천인 이외에는 모두 응시할 수 있었다’ 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통설은 마치 문과와 무과의 응시자격이 차이가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법제상 문과와 무과의 응시자격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양인이상이면 국가에서 정한 결격사유가 없는 한 누구나 모든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이때 결격사유란 사조(부, 조, 증조, 외조) 내에 천인 혈통이 없어야 하고, 조정에 서용되지 못할 죄인, 장리(장물죄)․재가․실행부녀의 자손, 서얼자손 등을 말한다. 다만, 무과는 문과처럼 장기간의 교육이 필요치 않았고, 군역종사자인 일반 평민들이 비교적 쉽게 응시할 수 있었다. 더구나 임진왜란 이후 한꺼번에 많은 수를 뽑는 만과가 시행되자 서얼, 천민까지도 포함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자『속대전』에 천인의 무과응시를 금지하는 규정이 마련되었다. 무과에 천인이 다수가 진출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위와 같은 사실은 무과급제자의 신분분포가 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원칙적으로 문무과 응시자격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천인의 과거 응시가 불법이라는 사실은 모든 과거에 다 적용되는 원칙이었다. 무과에 천인의 금지규정을 굳이 정한 것은 역으로 응시를 허용해서가 아니라 불법응시가 상대적으로 쉬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무과급제자의 신분에 근거하여 문무과의 응시자격이 마치 차이가 있는 것처럼 서술한 것은 수정되어야 한다.
5. 시험과목 - 무과는 활쏘기가 중심이었다.
무과는 처음에는 무예 6기와 강서 등 모두 7기예를 시험보았다. 즉 목전(나무살 쏘기), 철전(쇠살 쏘기), 편전(애기살 쏘기), 기사(마상궁술), 기창(마상창술), 격구 등이다. 그 가운데 목전과 철전은 과락제가 있어 3발 중 1발 이상 마쳐야 다음 과목을 치룰 수 있었다. 강서는 사서오경중 1서, 무경칠서중 1서, 통감․병요․장감박의․무경․소학 중 1서, 경국대전 등이다. 이들 과목은 격구의 예처럼, 기초무예의 능력을 평가하는 성격이 강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간단하고도 실전적인 무예가 강조되었다. 조총․편추(마상편곤)․관혁․유엽전 등의 새로운 무예가 추가되고, 표적을 쏘던 기사는 허수아비를 맞추는 기추로 바뀌었다. 임진왜란 이후 왜검을 비롯한 많은 검술과 창술 등이 연마되었지만, 정식 과목으로 채택되지는 않았다. 그 결과 『속대전』에는 모두 11기로 정비되었다. 식년시와 증광시가 11기를 모두 시험 본 반면에 각종 별시는 11기의 과목 중 2~3기를 시험보았다. 무과의 11기 과목을 구분해 보면, 궁술(목전, 철전, 편전, 관혁, 유엽전), 기마무예(기창, 기추, 편추, 격구), 조총, 강서 등을 시험 본 셈이다. 무과 11과목 중 특히 활쏘기가 모두 6기(기추 포함)로 절반이 넘는다. 실제 각종 별시무과에서 채택된 2~3 과목의 대부분은 활쏘기였다. 궁술 중심의 무과시험은 무과가 폐지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무과에서 활쏘기를 이처럼 강조한 까닭은 기본적으로 전술보다는 전략이 우선이라는 유교적 전쟁관과 함께 ‘육예(六藝)’ 의 하나로 인식한 때문이었다. 동시에 북방민족과의 투쟁에서 익혀 온 궁술이 ‘조선의 장기’ 였던 점도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의 무예’ 하면 곧 ‘활쏘기’를 의미하였고. 동시에 ‘조선의 무사’ 라 하면 곧 ‘활을 잘 쏘는 무인’을 뜻하는 말로 인식되었다. 또한 무과에 강서를 보는 까닭은 문무를 겸비한 무장을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병서를 통해 지략을, 유교경전을 통해 관리로서의 소양을 갖추게 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양반자제들이 무과에 쉽게 진출하는 발판이 되었다. 말을 이용한 기마무예가 많은 것도 경제력이 있는 양반에게 보다 유리한 시험과목이었다.
6. 무과는 양반의 과거였다.
무과는 문과와 함께 양반의 입사로였다. 조선왕조는 양반관료체제를 합리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문․무 양과를 실시하였다. 물론 문치주의를 지향한 조선사회에서는 무과에 비해 문과를 더 중시하였다. 하지만 문과는 그 선발인원이 제한되었다. 따라서 양반자제 가운데는 무과로 진출하는 경우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조선왕조도 가능한 양반자제들이 무과에 진출하기를 권장하였다. 문벌도 있고 능력도 갖춘 인재들이 무관이 되어 왕실과 국가를 수호하기 바랬던 것이다. 실제로 양반의 형제 가운데 문의 능력이 있는 사람은 문과로, 무의 능력이 있는 사람은 무과로 가는 사례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이것이 바로 조선 양반의 실상이자, 조선 무반의 실체였다. 물론 양반 가운데 평생 문과만을 고집하거나 아예 처사적인 삶을 사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많은 수의 양반들은 그 자식의 능력여하에 따라 문과와 무과로, 아니면 문음을 통해 관직에 나갔다. 만일 문무과에 나가지 못하면 잡과로라도 진출하였다. 이처럼 문과에 진출하기 어려운 양반자제들은 결국 무과로 진출하였다. 생원이나 진사로 무과에 합격한 경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관직을 획득하기 위한 양반자제들의 관심은 좁고 어려운 문과만을 고수해야할 필요성을 적지 않게 감소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실제로 무과는 문과에 비해서는 신분이 떨어지지만 양반자제들이 진출하였다. 현존하는 조선의 『무과방목』을 분석해 보면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급제자의 다수가 양반자제로 확인된다. 다만, 조선후기에는 만과의 실시로 인해 천민을 비롯한 하층민이 합격하자 양반자제들이 기피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 숫자가 줄어들긴 했지만 양반자제의 무과진출 경향은 그대로 이어졌다. 양반자제들이 무과에 진출한 배경은 원칙적으로 당상관이상의 고위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양반의 과거이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군영제도의 발달로 인해 무반 벌열의 자제들의 무과에 꾸준히 진출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하층민들의 무과 진출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의 무과가 여전히 양반의 관직진출로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조선후기 무반족보인 무보(武譜)의 탄생은 같은 무과출신이지만 결코 하층민과는 동일시할 수 없는 배타적 문벌의식을 드러낸 결과이다. 어쨌든 무과는 조선 전 기간동안 새로운 계층의 성장을 흡수하면서도 기존의 양반을 재생산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무과는 분명 양반의 관직진출로였다. 후술하겠지만, 조선의 수많은 사람들이 무과에 진출하려고 평생 노력한 까닭도 무과가 바로 양반의 징표라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볼 때, 무과는 결과적으로 조선의 지배층인 양반층에게 고려에 비해 축소된 문음제도를 보완하는 기능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7. 하층민의 희망이던 무과
조선의 과거제 가운데 무과가 주목되는 이유는 바로 하층민의 신분상승에 크게 기여했으리라는 판단 때문이다. 무과는 별도의 교육과정이나 어렵고 까다로운 시험절차를 통과해야 하는 문과와는 달리 비교적 합격하기가 용이했다. 그런 까닭에 문과로 나가기 어려웠던 많은 하층민들은 무과로 몰려들었다. 또한 무과는 무예와 강서를 함께 시험보았으나, 사실상 무예가 강조되고 요구되는 강서 시험도 단순한 형식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군역에 종사하고 있던 일반 평민들도 신분상 하자가 없는 한 무과 진출을 시도하였다. 실제로 임진왜란 이후 한꺼번에 수백, 수천명에 달하는 무과가 설행되자 하층민들의 참여는 불가피하였다. 전쟁 중에는 적의 머리를 베어오면 급제시키는 참급과가 실시되었다. 시급히 군사를 모으기 위한 무과에는 천인을 비롯한 하층민이 상당수 포함되었다. 전쟁 중 \"노비를 찾으려면 무과방목을 뒤져라\"라는 말이 유행한 것은 천인의 무과 진출을 엿 보게 해준다. 인조대에는 병자호란 중 호종한 천인들을 포상하기 위해 우선 면천시켜 무과진출을 허용하였다. 숙종 2년에는 만과를 실시하여 1만8천여명을 한꺼번에 뽑기도 하였다. 무과에서 수백, 수천 명을 뽑는 일이 잦아지자, 천인들의 불법 무과응시는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한 예로 평민이나 천인들 가운데 무과에 합격자가 나오자 이들을 구별하기 위해 ‘상한출신(常漢出身)’ 또는 ‘상천출신(常賤出身)’이라고 하는 칭호까지 생겨났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후기 사회경제력이 증대되면서 하층민들의 신분상승 욕구가 그만큼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조선후기에 무과에서 수천, 수만 명을 뽑은 배경에는 바로 과거 진출을 절실히 바라는 당대인의 욕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조선왕조는 이완되는 집권체제를 공고히 위해서도 성장하는 하층민의 신분상승 욕구를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결국 무과의 대량시취는 조선후기 사회변동과 함께 성장하는 하층민들의 신분상승을 충족시켜 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희망이었던 셈이다. 8. 무과의 기능과 특성 - 무과의 합격은 ‘따논 당상’ 무과에 합격하면 일단 합격증인 홍패를 받고 급제출신이 되었다. 출신은 원래 문과출신, 잡과출신, 문음출신 등 관직진출의 통로를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무과합격자가 워낙 많아지자 출신하면 으레 무과출신을 뜻하였다. 그럼에도 양반의 징표였던 무과에 합격한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은 클 수밖에 없었다. 흔히 ‘봉이 김선달’의 선달은 먼저 과거에 합격한 사람을 부러워 해 부른 칭호였다. 즉 문무과에 합격한 사람을 ‘선달(先達)’ 이라고 부른 것이다. 무과출신은 일정한 관품과 관직을 제수받았다. 장원은 문과와 같이 ‘출육(出六)’이라 하여 곧바로 종 6품을 제수받아 지방관이나 참상관이 되었다. 나머지 합격자는 성적에 따라 7품에서 9품을 제수받았다. 장원을 제외하고는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대기직에 발령을 받았던 것이다. 무과급제자들은 훈련원․별시위의 권지(權知)로 나누어 소속되었다. 이 분관도 처음에는 능력에 따라 결정되었으나, 뒤에는 문벌에 따라 우열이 정해져 출세에 영향을 미쳤다. 갈수록 무과출신이 늘어나자 대기발령은 상시적인 일이 되고 말았다. 무과가 관직진출로가 아닌 자격시험으로 변질된 것이다. 그러자 무과급제 후에 관직진출을 위한 시험제도가 늘어나게 되는 한편, 천거를 통한 관직 임명이 일반화되었다. 무과급제자 중 문벌이 있는 자는 선전관에 천거를, 그 다음은 부장 천거, 그 다음은 수문장 천거를 받았다. 그러나 천거를 받을 수 없었던 대부분의 하층민들은 무과에 진출한다고 해도 관직으로 나가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러자 홍패를 품은 채 평생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백수선달(白首先達-오늘날 백수건달로 바뀜)’로 늙어죽는 사례가 비일비재하였다. 그럼에도 무과는 무엇보다 문과와 함께 3품 이상의 당상관에 오를 수 있는 시험이었다. 이점은 음서나 잡과가 원칙적으로 3품 이상 오를 수 없었던 점과 구별된다. 물론 무과 출신이 3품 이상에 오르려면 남다른 능력과 천거를 비롯한 가문적 배경이 뒷받침돼야 하지만, 무과의 합격은 일단 ‘따논 당상’ 을 확보한 셈이었다. 무과가 국왕과 함께 국가 중대사를 논의하고 정치적 책임이 있는 부서의 장관을 맡는 당상관이 되는 통로라는 사실은 중앙정치세력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말해준다. 물론 문반 중심의 구조로 짜여진 조선 관료제사회에서 무반 당상관의 정치적 역할에 한계가 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무과출신이 조선 전 시기에 걸쳐 군영의 대장을 비롯해 대사헌, 육조판서, 삼정승까지 올라 치국의 일익을 담당한 사실은 무과의 정치사회적 기능을 잘 말해준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무과는 태종 2년(1402)부터 고종 31년(1894)까지 493동안 770회를 시행하여 약 15만여명을 선발하였다. 이러한 수치는 문과의 총 인원 약 5만 여명과 비교하면 3배이다. 이러한 결과는 무과가 조선사회에서 문과에 비해 휠씬 광범위하고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음을 의미한다. 문과가 양반의 신분유지에 비교적 충실한 제도였다면, 무과는 위로는 양반에서 아래로는 하층민까지 다양한 신분층이 관직진출의 꿈을 실현하는 특성을 가진 제도였다. 결국 무과는 조선 5백여년간 조선의 양반신분제사회를 유지하고 중앙 정치세력을 충원했던 관리선발제도로서 기능하였다.